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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이 주제인가
모든 숙고는 대개 현실의 문제라는 씨앗에서 싹틉니다. 2024년 12월 3일의 비상계엄 선포와 뒤이은 해제는, 우리가 익숙하다고 믿어 온 제도와 규칙을 다시 묻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뒤에도 이어지는 국내외 갈등의 장면들은 때로 모든 전제를 내려놓고 state zero, 곧 완전한 무전제의 출발점에서 다시 생각하고 싶은 충동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축적된 역사와 언어, 개념과 경험을 완전히 벗어난 채 사고할 수 있을까요. 완전한 가치중립적 관찰자를 상정하기보다는, 내가 어떤 전제 위에서 보고 있는지를 먼저 드러내는 편이 더 정직할 수 있습니다. 과학도 사회적 사용과 제도적 선택에서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1945년 맨해튼 프로젝트와 핵무기의 실제 사용은 과학적 지식이 국가·전쟁·정치적 결정과 결합할 때, 하나의 가능성이 어떤 역사적 현실로 변환될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인류는 수많은 혁명과 좌절, 개혁과 반혁명을 거쳐 왔습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정치적 가능성은 산업혁명의 생산력과 만났고, 그 생산력이 누구의 것이며 어떻게 배분되는지를 둘러싸고 마르크스 이후의 긴 사상사가 전개되었습니다. 의식, 헤게모니, 제도, 주체, 욕망, 물질적 한계에 대한 이론들은 서로를 단순히 대체했다기보다, 앞선 설명으로도 남아 있던 병목을 다른 위치에서 발견해 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이른바 ‘AI혁명’ 앞에 서 있습니다. 앞으로 열릴 미래는 막대한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불러옵니다. 하지만 미래를 말하기 전에 먼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 가능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이미 가능하지만 막혀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가능성이 어떤 인터페이스를 통과하면서 다른 결과로 바뀌는가. 그리고 그 갈림의 방향을 실제로 바꿀 힘은 누구에게 있는가.
이 책은 1789년에서 오늘의 AI, 그리고 아직 날짜가 정해지지 않은 20XX의 미래까지를 ‘가능성 → 병목 → 변환 → 현실’이라는 하나의 문제틀로 읽어 보려는 시도입니다.
여기서 예측은 특정 정치세력이나 기술의 승패를 점치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조건이 바뀌면 가능한 미래의 경로가 달라지는지, 무엇을 관찰하면 우리의 판단을 수정해야 하는지를 묻는 조건부 예측에 가깝습니다. 이 글은 현실을 하나의 이론에 끼워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론이 현실 앞에서 어디까지 버티는지를 시험하려 합니다.
네 개의 질문
가능성. 새롭게 할 수 있게 된 것은 무엇인가.
병목. 그 가능성은 어디에서 막히거나 방향이 갈라지는가.
변환. 가능성이 실제 사회적 결과가 되는 과정에서 무엇이 바뀌는가.
현실. 결국 누구에게 어떤 결과가 귀착되고, 그 현실은 다시 다음 가능성의 조건을 어떻게 만드는가.
이 네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프랑스혁명, 산업혁명, 마르크스 이후의 사회이론, 인터넷과 플랫폼, 그리고 AI는 서로 멀리 떨어진 사건이 아니라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는 사회적 과정’이라는 하나의 긴 역사 안에서 다시 만납니다.